설교자 박봉수 목사 본문 요 11:38-44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24-03-03 20:07:44
설교일 2024-03-03
예수님께서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이야기

 

 

 예수님께서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이야기

 

요 11:38-44

 

   성경에는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나는 이야기들이 여럿 기록되어있습니다. 구약에 세 번 그리고 신약에 다섯 번이나 나옵니다. 특히 예수님께서 직접 죽은 자를 살리신 이야기는 세 번이나 나옵니다. 야이로의 딸을 살리시고, 나인성 과부의 아들을 살리시고, 그리고 나사로를 살리시는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들은 우리에게 분명한 메시지를 전해줍니다. 바로 인간의 생명을 주관하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 뿐이시라는 것입니다. 사람이 태어나고, 살고, 그리고 죽는 그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분은 오직 한 분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성경의 이런 죽은 자를 살리신 이야기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사건입니다. 바로 예수님께서 친히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이야기입니다.

   베다니에 살던 나사로가 병 들자, 그의 자매인 마르다와 마리아는 예수님께 도움을 청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일부러 즉시 가지 않으시고 이틀이나 지난 뒤에 베다니로 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다니에 도착하시니 이미 나사로의 장례가 끝났고, 죽은 지가 나흘이나 지난 뒤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마르다를 만나서 믿음의 고백을 확인하셨습니다. 그리고 마리아의 눈물을 보시고 위로하셨습니다. 그후에 나사로의 무덤으로 가셨습니다. 무덤을 막고 있는 돌을 치우라 명하신 뒤 하늘을 우러러 기도하시고, 큰 소리로 말씀하셨습니다. “나사로야 나오라.” 죽었던 나사로가 무덤에서 걸어 나왔습니다.

   이 이야기에는 다른 죽은 자를 살리신 이야기와 차별화되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나사로가 이미 죽어서 장례를 치렀고, 무덤에 장사된 후였다는 것입니다. 다른 죽은 자를 살리신 사건이 일어난 것은 아직 장례를 치르기 전이었거나 적어도 무덤에 안치되기 전입니다. 그런데 이 사건은 일단 장례를 치렀고, 시신이 무덤에 안치된 후에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시신이 수의를 입은 채 썩는 냄새를 풍기며 살아서 무덤에서 걸어서 나온 사건입니다.

   그래서 이 사건은 그 만큼 놀랍고도 충격적 사건이었습니다. 그야말로 전무후무한 사건입니다. 그 무엇과도 그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예수님의 능력이 나타난 사건입니다.

 

   그러면 요한은 왜 이 사건을 이렇게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을까요? 이 이야기를 통해 우리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는 무엇이었을까요? 본문을 자세히 살피면서 그 답을 찾아보겠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25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예수님께서 나사로가 이미 죽었고 무덤에 장사지낸 것을 아시고, 이 상가를 찾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신다는 소식을 듣고 맞으러 나온 마르다를 만나셨습니다.

   이 때 놀라운 말씀을 하셨습니다.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 그런데 마르다가 이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자기 나름대로 이해하고는 이렇게 답을 했습니다.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

   예수님께서는 지금 다시 살아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마르다는 마지막 날에 다시 살아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오해한 것입니다. 사실 당시 믿음이 있다는 보통 사람들의 생각이 다 그랬을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더 놀라운 말씀을 하셨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이 누구신지를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바로 예수님의 자기 선언입니다.

   우리가 주목할 것은 예수님께서 부활과 생명이라고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부활하게 하시는 분이시라는 말씀이고,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는 분이시라는 말씀입니다. 실제로 우리가 이 말씀을 그대로 믿으면 우리가 부활하게 되고 새생명을 얻게 됩니다.

   우선 이 땅에서 사는 동안에도 예수님께서 주시는 새생명을 얻고 부활을 경험하게 됩니다.

 

  우리나라 초대교회시절 큰 영적 지도자였던 김익두 목사님 이야기입니다. 이 분은 원래 황해도 일대를 주름잡던 건달이었습니다. 장터에서 건달로 행패를 부리며 살다가 선교사가 전해주는 전도지를 받은 것이 계기가 되어 예수 믿고 새사람이 됐습니다.

  어느 날 이분의 부고가 전해졌습니다. 사람들이 장례식장에 모였습니다. 실제로 관도 놓여있고, 장례식장이 그럴듯하게 꾸며져 있었습니다. 시간이 되자 죽었다던 이분이 나타났습니다. 사람들은 이번에는 무슨 행패를 부릴까 두려운 마음에 떨고 있었습니다.

  이분이 모인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러분, 놀라게 해서 미안합니다. 김익두는 정말 죽었습니다. 예전의 김익두는 죽어 이 관에 누워있고, 여기 서있는 김익두는 예수 믿고 변화된 새사람입니다. 이것을 알려드리기 위해 여러분을 이 자리로 모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으면 옛사람은 죽고 새사람으로 다시 태어납니다. 이것을 신학에서는 ‘중생’ 곧 거듭남이라고 합니다. 이 때 우리는 예수님께서 주시는 새생명 즉 영생을 얻게 됩니다. 우리가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면 우리는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라고 말씀하신 바로 그 예수님이 주시는 새생명을 얻었고 부활을 체험한 것입니다.

   다음으로 우리가 죽어서 이 세상을 떠난 뒤에 부활하게 될 것이고 새생명 즉 영생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고전 15:20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사망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한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무덤에 장사되신 뒤 사흘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단지 예수님의 부활로 끝나는 사건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첫 열매의 사건이라는 말씀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것처럼 장차 예수 믿는 사람들이 부활하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미 죽은 우리 믿음의 선배들을 다시 부활시키실 것입니다. 그리고 장차 우리가 죽은 뒤에 우리도 다시 부활시키실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믿음의 선배들의 죽음을 슬퍼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부활이요 생명이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네가 믿느냐”

 

  본문 26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이렇게 물으셨습니다.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예수님께서 마르다의 믿음을 확인 차 물으신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예수님께서 “네가 믿느냐?”라고 물으신 의도는 무엇일까요? 이 질문에 답을 찾으려면 당시 마르다의 영적 상태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21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마르다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만일 나사로가 병들었을 때 예수님께서 여기 계셨다면 고쳐주셔서 죽지 않았을 것이라고 믿는다는 말입니다.

   22절을 보면 또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 예수님께서 지금이라도 하나님께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다 들어주실 것을 믿는다는 것입니다. 

   23-24절을 보면 또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 마르다가 이르되 마지막 날 부활 때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 나사로가 죽었지만 마지막 부활의 때 다시 살아날 줄 믿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마르다의 믿음의 고백을 들으셨습니다. 마르다는 믿음이 전혀 없던 상태가 아니었습니다. 나름대로 대단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보실 때에 아직 부족합니다. 지금 나사로가 살아날 것이라는 것을 믿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롬 12:3을 보면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있습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 여기 각 사람에게 믿음의 분량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람마다 믿음의 크기가 다 다르다는 것을 말씀합니다.

 

  어떤 아이가 낚시를 하고 있었습니다. 제법 낚시를 잘해서 고기를 잘 낚았습니다. 그런데 고기를 잡으면 자기 손바닥으로 그 고기의 크기를 재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 손바닥 보다 크면 다시 살려서 보내고 손바닥보다 작은 것들만 고기 담는 통에 넣었습니다.

  옆에서 지켜보던 한 신사가 궁금해서 물었습니다. “물고기를 살려주려면 작은 것을 살려주고 큰 것은 가져가야 하지 않니?” 아이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우리 집에 있는 고기를 요리할 프라이판이 제 손바닥만해서요.”

 

   지금 마르다의 믿음이 이렇습니다. 다른 것은 다 믿어도 죽어 무덤에 장사된 지 나흘이 지난 시신이 다시 살아난다는 것은 믿지 못했습니다. 자기의 믿음의 분량으로 감당이 되지 않았습니다.

   이 아이처럼 주님께서 정말 큰 고기를 주시겠다고 하는데 요리할 그릇이 작아서 받을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안타까운 마음에 예수님께서 물으셨습니다. “네가 이것을 믿느냐?”

   우리는 어떻습니까? 믿음의 분량이 작아서 주님의 큰 역사를 받지 못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오늘도 주님께서 우리에게 물으십니다. “네가 이것을 믿느냐?”

   사랑하는 여러분! 믿음의 분량을 키우십시오. 그리고 주님께 “아멘! 제가 믿습니다.”라고 답하고, 큰 역사를 이루시기 바랍니다.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본문 33절 이하를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그가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비통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사 그를 어디 두었느냐 이르되, 주여 와서 보옵소서 하니,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예수님께서 큰 슬픔 중에 울고 있는 마리아와 유족들을 보시고 보이신 반응을 이렇게 기록한 것입니다. 비통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시다가 끝내 눈물을 흘리셨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예수님의 마음속에 일어나는 변화를 주목해서 보게 됐습니다.

   우선 상을 당하여 슬픔 가운데 있는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눈으로 그들의 딱하고 안타까운 모습을 보셨습니다. 그리고 귀를 열고 그들이 하는 말을 경청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이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비통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사”라는 말씀처럼 예수님의 마음에 ‘연민’(sympathy)이 일어났습니다. 여기서 연민이라는 말은 슬픔을 당하고 있는 사람에 대한 측은한 감정을 말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마음은 더욱 강열하게 움직였습니다.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이것은 예수님의 마음에 ‘공감’(empathy)이 일어났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공감은 슬픔 당하는 사람의 그 슬픔을 자신도 느끼는 것입니다.

   여기서 연민과 공감은 비슷해 보이지만 분명히 다릅니다. 우선 연민은 슬픔을 당하는 사람을 밖에서 보고 그 슬픔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나도 겪어봐서 아는데 정말 슬프겠다. 참 안됐다.”라고 말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제 비해서 공감은 슬픔을 당하는 사람 그 속으로 들어가 그 슬픔을 함께 느끼는 것입니다. 무슨 말을 하지 못합니다. 그저 곁에서 함께 우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너무 슬퍼서 우는 마리아와 유족을 보시고 연민을 느끼셨습니다. 얼마나 슬플까 참 불쌍하다 생각하셨습니다. 그리고 바로 연민을 넘어 공감을 하셨습니다. 말없이 눈물을 흘리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가 힘들어 울고 있을 때 우리를 보시며 말씀하십니다. “힘들지, 내가 네 슬픔을 안다.” 그리고 어느새 우리 곁으로 오셔서 말없이 울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 우리가 고통 가운데 힘들어 할 때 우리를 보시며 말씀하십니다. “아프지, 내가 네 아픔을 안다.” 그리고 어느새 우리 곁으로 오셔서 그 고통을 겪으시며 말씀하십니다. “나도 아프다.”

   

   본문 36절을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에 유대인들이 말하되, 보라 그를 얼마나 사랑하셨는가?” 예수님께서 눈물 흘리시는 모습을 보면서 상가를 찾았던 조객들, 유족들이 이렇게 말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공감이 슬픔 당하는 사람들에게 전달됐다는 것입니다.

   마리아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예수님께 자기의 속마음을 다 털어놨습니다. 오라비 간병하며 힘들었던 이야기, 죽어가는 오라비를 보며 아무 것도 할 수 없어 속상했던 이야기, 그리고 오라비가 죽는 그 모습을 보고 슬펐던 이야기... 그러면서 어느 정도 진정하며 슬픈 마음이 가라앉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눈물 흘리시는 모습을 보게 됐습니다. 그 모습을 보며 또 눈물이 납니다. 그러면서 말로 설명할 수 없는 큰 위로를 받았을 것입니다.

 

  가수 윤복희가 부른 [여러분]이란 노래는 수많은 가수들이 리메이크해서 불러서 너무도 유명한 노래입니다. 가사가 이렇습니다.

네가 만약 괴로울 때면 내가 위로해줄게

네가 만약 서러울 때면 내가 눈물이 되리

어두운 밤 험한 길 걸을 때 내가 내가 내가 너의 등불이 되리

허전하고 쓸쓸할 때 내가 너의 벗되리라

나는 너의 영원한 친구야. 나는 너의 형제야

  그런데 사실 이 노래는 원래 영어로 먼저 가사가 만들어졌습니다. 원 가사를 보면 CCM곡입니다. 원 가사의 제목이 ‘바로 너야’(It’s You)입니다. “내가 왜 하나뿐인 내 아들을 세상에 보낸 줄 아니 그 이유가 바로 너야”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영어 가사를 보면 이렇습니다.

When you walk through the cloudy days

(네가 구름 속 어두운 시절 지날 때)

He said, I'll be the one to be your cane

(주님이 말씀하셨지 내가 너의 지팡이가 돼줄게)

When you need someone to share your love.

(네 사랑을 나눌 누군가가 필요할 때)

He said I’ll be the one to be your love.

(주님이 말씀하셨지 내가 너의 사랑이 돼줄게)

So smile and look at me.(그래 웃어봐, 그리고 나를 봐)

 

   윤복희씨는 이혼의 아픔 속에 너무도 힘든 시기를 보낸 적이 있었습니다. 그 때 자신을 찾아와 위로해 주시는 주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그 주님의 위로로 그 힘든 시절을 이겨낸 적이 있었습니다. 그 때 자신이 체험한 주님의 위로를 전하기 위해 이 곡의 가사를 쓰게 됐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은 슬픔 중에 눈물 흘리고 있는 마리아를 찾아 함께 울어주시며 위로하셨습니다. 윤복희씨가 눈물 짓고 있을 때 찾아가서 위로하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눈물의 골짜기를 지날 때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그리고 함께 울어주시며 위로해 주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고난 중에 있는 우리를 찾아오시는 주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의 고난에 공감하시며 위로해 주시는 주님의 위로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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